나는 언제나 이 이야기를 사랑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게 바로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다윗 같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처리해야 할 일로 바쁘고 까다로운 사람들과 반항하는 자녀들을 다루며 온갖 시련과 유혹에 대처하는 등 힘겨운 삶의 와중에서도 별 볼일 없는 낯선 이에게 기꺼이 사랑을 베풀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랑을 한결같이 지켜 가는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이 다윗과 므비보셋 이야기를 사랑하는 또 다른 까닭은,
내가 속한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그 이야기의 반영과 반향을 보고 듣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인간들도 때로는 권력과 성공의 마수에 굴하지 않고,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배신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에게조차도 상처받을 위험을 무릅쓰고서 사랑을 베풀 기도 한다. 이는 복음과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 용기를 내어 그러한 사랑을 시도할 때마다 복음은 한 번 더 선포되는 것이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보다 더 잘 믿을 수 있게 된다.
다윗은 어린시절에도 기도의 삶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삶,
즉 믿음과 신뢰와 간구의 내적 운동이
순종과 정의와 사랑의 외적 행동을 일으키는 삶-을 산사람으로서 드러났다.
그리고 다윗은 밧세바와의 만남을 통해,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죄짓는 다윗
‘죄’ :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하려는 것,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 드는 것-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겨냥하는 초점이다.
당신이 바로 그 여자다.
복음은 언제나 실제 사람, 실제 고통, 실제 문제, 실제 죄에 대한 것이다.
동정심과 분개는 우리가 끝도 없이 즐길 수 있는 종교적 감정으로서, 우리에게 굉장한 우월감을 불어넣어 주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윗은 동정하며 분개하며 매순간 더 종교적이 되어 가고 도덕적 감상의 거대한 진창에 빠져든다.
그러나 갑자기 복음이 정확히 초점을 맞춘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 개인적인 도전에 그는 개인적으로 응답한다.
(삼하 12:13)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기를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다.
그는 바로 죄인이다!
문제 있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다.
Felix culpa : Oh happy sin!
나의 죄를 인지하고 고백할 때에야 비로소 나를 나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응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주된 임무는 내가 범한 죄를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의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정직과 찬양과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한다.
자신이 범한 죄 문제에 계속 골몰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죄는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고 곧 지루해진다.
일단 죄를 인식하고 고백한 다음에는, 그것에 대해 적게 말할수록 좋다.
시편 51편.
다시 찾은 하나님에 대한 감동적인 고백이다.
죄인의 자리는 책망과 정죄릉 받는 자리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자리라는 소식 말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