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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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이지는 않기를 ⠀ 서교동에서 ‘환생’이라는 옷 수선집을 운영하여 다른 이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옷을 되살리는 일을 하는 한아. 그는 저탄소 생활을 실천하며 지구를 아끼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온 애인 경민이 전과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 모습에 허무맹랑한 의심을 하고 만다. 경민이 경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 그렇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읽다 보면 그 설마가 정답임을 금세 알게 된다. 황당무계한 설정에 잠시 정신을 놓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외계의 존재는 하이퍼리얼리즘적인 발언으로 우리를 정신을 세게 때린다. 지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하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지구를 파괴하고, 서로를 헐뜯고, 본질보다 형식을 찾고, 모든 생명을 착취하려 한다고. 가히, 우주적으로 부끄럽지 않은가. ⠀ 지구인을 조금 닮지 않은 한아의 모습에 반해 그는 우주적인 사랑으로 머나먼 우주를 건너온다.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살면서도 그에게 우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 한아는 그야말로 우주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지구에 있기에는 너무나 우주적인 시야를 가진, 그러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 말 없이 떠난 전 애인을 향해 한아는 한참 욕설을 쏟아붓지만, 그것도 잠시. “한아만큼 한아의 신념을 사랑”하는 그의 태도에 한아 역시 서서히 그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다. 그의 사랑은 보편적인 지구의 것과 달랐으니까. 아이를 강요하거나 직장을 그만두게 하거나 남자의 기를 세워줘야 한다며 정서적·물리적 내조를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한아가 지키려던 삶을 보다 굳건하게 만들었으니까. ⠀ 아이러니하게도 한아는 아무런 접점도 없던 ‘우주의 존재’와 온전한 자신으로 사랑하고 교감할 수 있었다. 태어난 방식부터 죽는 방식까지, 생로병사가 다른 두 사람은 10년 동안 한결같은 금요일을 함께 보냈음에도 “둘 중 한 사람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우주만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야만 했기에,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같은 한국(지구)에서 나고 자라 지구인으로 지내면서 당연히 안다고 여기는 오만한(지구적인) 오해가 그들에겐 없었다. ⠀ 지구에서 한아뿐이지 않기를 바란다. 우주적인 시야로 지구를 바라보려 노력하는 사람이, 우주적인 부끄러움을 직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비록 우리가 우주적인 시야와 삶을 갖지 못하더라도, 우주적인 부끄러움은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않아야 나아갈 수 있다. ⠀ ⠀ #1 우주적인 시야로 소설을 쓰는 정세랑 작가는, 혹시…… (우주적으로 재밌는 소설을 쓴다고는 생각합니다.) ⠀ #2 우주에도 악취미인데 실행력은 또 지나치게 좋은 이들이 존재해서, 한 지구 애호가가 소규모로 재현해놓은 ‘제2 지구’가 있었다. 이름과 달리 지구와 그다지 비슷하지 않았다. 적어도 7층은 되어 보이는 빌딩에서 사람들이 풀쩍풀쩍 뛰어내리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는 걸 보고 한아는 놀랐다. (……) “저기 진짜 지구인은 한 명도 없는 거네.” “아니, 딱 한 명 있어. 지구 애호가가 불법으로 납치해간 사람이 한 명. 심지어 한국인이야. 용인 출신인데 어린 시절부터 아르바이트한 경험으로 해외 놀이공원에 취직하려다가 저기로 납치당했대. 지구 애호가가 죽고 다시 자유를 얻었지만 돌아오지 않고 저기 남았어. 천사의 애인이란 소문이 있는데 내가 봐도 꽤 뜨거워 보이더라.” 『지구에서 한아뿐 』中 「36」 ⠀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실린 「모조 지구 혁명기」를 보면 ‘제2 지구’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아르바이트로 해외 놀이공원에 취직”하려다 납치당한 한 사람이 “천사의 애인”으로 살아가는 것까지 쏙 빼닮았다. 한아와 우주 광물은 과연 어떻게 지내다 왔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