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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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또 한 살을 먹었다. 2019년 역시 바쁘게 하루하루 지나왔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맡게 살아왔다. 건방지게 주변과 스스로를 평가하자면 무능하고 이기적인 리더들을 만나 무기력하고 불행한 직장 생활을 했다. 아니 나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었다. 퇴근 후 돌 지난 아기를 돌보는 일, 하루 종일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 지쳐 있는 아내를 배려하는 일 역시 내 깜냥에선 많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안 하던 짓을 하기로 했다. 그 전에는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누워 있거나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올해부터 남는 시간에 책을 보기로 했다. 책 속에 답이 있을 거라 믿었고 활력이라는 에너지를 얻고 싶었다. 올해 처음으로 잡게 된 책. 김훈의 칼의 노래. 10년 전에 사놓고 쓰윽 한번 읽고는 덮어둔 책이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이후 다시 조선수군통제사 자리로 복직하고 명량해전의 대승부터 노량해전에서의 마지막 죽음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그 책. 드라마로 영화로 다양한 콘텐츠로 인해 이순신의 삶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칼의 노래라는 소설만큼 영웅으로서의 이순신보다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에 집중한 콘텐츠는 없다고 생각했다. 처절했던 그 때의 이야기를 통해 나태한 2020년의 내 자신을 채찍질하고 싶었다. 10년 전처럼 겉핡기 식으로 읽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소설의 첫 번째 단락을 여러 번 읽었다. 작가가 가장 신경 써서 적는다는 첫 문장, 첫 단락이라 더 신경 써서 읽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첫 문장이다. 늘 변치 않는 자연과 바다와 달리 임진년부터 정유년까지의 조선의 상황은 끔찍하게 변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소설 처음부터 상세히 묘사된다. 아이를 죽여 그 고기를 먹는 백성의 끔찍한 가난과 조정에 전과로 등록받기 위해 아군 적군 구분 없이 시체의 목을 베는데 급급한 당시의 지휘관들의 모습까지 적나라하다. 벌써부터 마음이 어두워진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놀라지 말자고 다짐하며 한 페이지, 한 문장씩 신중히 진중하게 읽어 나갔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당시 이순신 장군이 되어 함께 그의 고충을 짊어졌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이순신 장군 1인칭 시점에서 사건이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소설 앞 부분부터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가 '베다'이다. 장군님은 정말 많이 사람을 죽인다. 적군은 당연한 것이고 군령을 어기고 탈영을 한 부하부터 잘못을 저지른 관리까지 사정 없이 목을 벤다. 읍참마속의 제갈량보다 몇 수 위다. 전시 상황에서 그는 누구보다 냉정하게 책임자로서 형을 집행했다. 그러면서 소설은 형을 집행해야만 했던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 또한 살뜰하게 다룬다. 또한 백의종군 이후 출옥한 아들을 보기 위해 떠나는 길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 명량에 대한 보복으로 아산에서 살해당한 아들의 이야기, 사무치는 감정으로 대했던 여진이라는 여인이 왜놈들에 의해 능욕 당하며 죽었던 일에도 슬픔을 억눌러야 했던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엿볼 수 있다. 심지어 죽여야만 했던 적들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고민과 고뇌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적이지만 그들의 개별적인 죽음 앞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 그의 모습에서 소설 속 이순신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정말 이 소설을 집필했던 당시 누구보다 그 시대의 이순신이 되기 위해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생각했고 상상했고 노력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처절함을 칼의 울음을 소설로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소설을 읽으면서 몇 번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른다. 1주일 동안 이 책을 두 번에 걸쳐 읽으면서 답답한 마음에 탄식도 자주 했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마음은커녕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며 칼자루를 내부에서 휘둘렀던 선조. 물론 소설에서는 선조를 마냥 나쁜 놈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왕으로서의 입장에서 그를 두둔하기도 하지만 절대 리더로서의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인조와 함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임금이지만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리더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에서 백성과 국민을 쉽게 버리는 리더는 또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은 명의 참전이 가지는 의미이다. 교과서에서는 단순히 명의 참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우방인 조선을 지켜주러 왔다는 순진한 생각따윈 이 소설에 없다.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파병했고 전쟁으로 피폐화된 우리 백성들에게 끔찍한 갑질까지 행한다. 물론 당시 임금은 그 현실을 외면하고 명바라기만을 시전한다. 당시 왜, 명과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두 번의 큰 전쟁으로 심한 고초를 겪은 조선의 역사를 그저 과거로만 기억하기에는 지금의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국제 정세 역시 비슷한 점이 많다. 또한 백성들의 삶은 언제나 고달프다. 영화 기생충에서 지금 시대의 백성이 누군가에 대해 선을 확실히 그어주었다.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 나는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로. 이순신 장군의 관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지만 나 역시 이 시대의 백성으로서 소설 속 숱하게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백성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국가를 만나 외세의 침략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포로로 붙잡혀 그들의 시중을 들고 노동에 투입되고 전쟁터에 총알받이 또는 격군으로 투입되었다. 일본군 배의 노를 저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목숨을 부지하려면 조선 함대와의 전투에서 일본이 이겨야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게 늘 졌고 아이러니하게 조선의 백성들은 조선말로 살려달라고 외치며 우리 바다에 수장당해야했다. 살아남은 자들 역시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배가 고파 명나라 군인들의 똥을 서로 먹겠다고 다툰다는 내용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소설 속에는 끼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가올 한 끼의 식사 앞에 그 전에 행했던 모든 끼니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참 인상 깊었다. 늘 당연하게 생각했던 한 끼 식사의 무게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실망스러운 조정 앞에서 이순신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도 독서하는 중간에 살짝 가졌다. 실질적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고 백성들 역시 그를 지지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상황에서도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았다. 세금 역시 그들의 삶을 지켜주겠다는 의무와 약속의 대가로 받았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왜적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군인으로 비통해 했다.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혀 어쩔 수 없이 일본 군대에 가담해 조선 수군에게 총을 겨누었던 조선인 포로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부하에게 백성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고 나의 잘못이라 말한다. 물론 정치에 아둔했던 그였기에 음해와 모략으로 고문과 백의종군이라는 수치를 겪었고,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을 듯 하다. 나 혼자만의 망상으로 결론지을 수도 있지만 선조는 불안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승전보를 올리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이질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면 어떡하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순신이 필요했지만 그가 이길 때마다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당시 이순신은 선조라는 무책임하고 심약한 지도자, 반드시 무찔러야 하는 적, 전시 상황에도 국가보단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대신들, 남의 전쟁을 통해 한 몫 쥐려는 명, 참혹하게 살아야만 했던 그 시절의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해내는 이순신의 모습은 왜 그가 추앙 받는 위인이고 영웅인지 보여준다. 소설 처음부터 그는 천명처럼 죽음을 받아들였다. 다만 본인에게 주어진 소명 앞에 어느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지를 고민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척이나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한 전쟁 영웅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나가려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지를 알게 되었다. 올해는 충남 아산, 경남 거제, 전남 진도와 같이 이순신 장군의 행적과 칼의 노래라는 소설 속 배경으로 등장한 곳으로 꼭 여행을 가고 싶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나의 마음을 더 단단히 하고 싶다. 작가님의 바람처럼 나 역시 무리를 아늑해하지 않으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