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토라짐을 아기의 떼쓰기로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것도 큰 특권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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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토라진 사람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특별한 표적이 되었을 때에도 온화하게 웃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그 애처로운 역설은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토라진 사람은 키 180센티미터에 성인의 직업을 견뎌내고 있을지라도,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우리보다 어리게 여기는 것을 윗사람 행세로 보는 생각이 만연한 탓에 우리는 성숙한 자아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내면의 아이를 만나는 -그리고 용서해주는-용서해주는-것이 가끔은 가장 큰 특권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