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 알랭 드 보통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지고, 싫증나고, 또 다시 갈망하고, 그러다 이별하고, 자기혐오와 자기합리화 속에서 끊임없이 사랑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다 다시 한번 누군가에 빠지고야 마는 것. 수없이 많은 아이러니와 비논리로 가득찬 감정인데도, 결국은 다시 핰번 시작하고 싶어지는 것. 내가 다시 한번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사랑이 시작되고 또 끝이 날때 던지는 대책없는 질문들이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재'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지 절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음에도, 우리는 '너 자체'를 좋아한다는 긍정적안 대답을 들음으로서 안정감을 찾는다.
연애가 시작되고 끝나고 새로 시작되는 과정 속에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의문과 생각에 대해 담아낸 소설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와 비슷한 플롯을 가진 것 같아 생각이 났다.
머나먼 타국의 유명 작가마저 사랑하고 헤어질 때의 이런 '찌질한' 생각들이 나와 비슷하고, 또 이렇게 베스트셀러란 걸 보면 정말 사랑 앞에 찌질하지 않은 사람은 없나보다. '선악'에 대한 파트에서 찔리기도 했다. 내가 아직 더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선인인 것은 아닌데, 상대가 그렇게 나빠보일 수가 없으니까. 읽으면서 이렇게 공감되는 걸 봐서 여전히 난 '성숙'한 사람 되어 성숙한 사랑하기란 그른 것 같다.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활자로 보는 것에 익숙치 않은 건지 무슨 심보인지 연애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예전에 알랭 드 보통의 무슨 책을 읽었었는데 큰 감흥도 없었어서 이 책을 읽기까지도 좀 망설였는데) 사랑에 대해 이제 이렇게 생각하고 공감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랑의 특징을 생각했을 때 그 어떤 일관적인 교훈을 내리기 힘든 의미 없는 고찰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한 번 더 빠지게 되는 것이 사랑이니까. 언제고 같은 것을 반복하리란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한 번 더... 이왕 할거면 이렇게 구체적인 논리들과 함께 해보면 더 재밌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이 보편성을 담을 수 있다는
작가의 확신과 능력이 부럽다.
오아시스 콤플렉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그러나 오아시스 컴플렉스가 완전한 망상인 것만은 아니다. 사막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 지평선에서 무엇인가를 본다. 다만 야자나무는 시들었고, 우물은 말랐고, 오아시스는 메뚜기로 뒤덮였을 뿐이다. <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낙인이 찍히고, 성격 부여가 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도 우리를 바비큐 꼬치에 꿰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적합하게 꿰는 사람일 뿐이다. <나의 확인>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 / 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선악을 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