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로 구병모 작가의 세계에 입문한 뒤 두 번째로 읽은 소설. 고작 두 권으로 그의 세계를 단정짓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온전히 내 몫으로 돌려졌을 독자의 개인적인 감상이라는 명목의 비호를 받으며 내 나름대로 해석한 세계에 대해 몇 자 남기고자 한다.
이름이 갖는 의미란 무엇이고 또 이름이라는 것은 얼만큼 중요한 것일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 말하듯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은 고작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구병모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조금도 평범하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입 속에서 굴리며 생각했었다. 작가가 주인공들에게 매번 흔치 않은 이름을 지어주는 특별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 지를. 함부로 불려질 수 없던 왕들의 이름처럼, 비극적인 생을 살지만 그 이름만큼은 귀하게 여겨져 함부로 불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고 마음대로 넘겨짚는다.
강하와 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컸다고 해서 전부 형제처럼 지낼 순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형제. 사랑에 뚜렷한 모양과 색상과 온도가 없듯이 곤을 향한 강하의 사랑 또한 제 나름의 온도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학습된 모양이 아니었을 뿐이지 분명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버려진 주제에 괜한 정이 많은 강하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강하의 표현방식이 또 한 번 보편성에 어긋났을 뿐이지 강하는 곤을 사랑하고 저를 버린 엄마를 사랑했고 할아버지를 지독히 사랑했다. 결과가 빤한 일에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언젠가 곤을 떠나보내야할 것이 빤해서 덜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것 뿐이다. 그 모습이 눈물나게 애처로워서 혼났다.
곤과 이녕의 관계에서 배운 것은 평행선을 이루듯 아주 다른 삶을 살아온 완벽한 타인들이 서로 얽히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다는 점이었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일 수록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잃을 것이 많다고 착각하고 지내는 바람에 완벽한 타인을 자주 경계하고 의심했었지만 어느 날 내 밑천이 드러나버리면 이녕과 곤처럼 망설임 없이 경계를 허물어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가미는 분명 숨을 쉬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인데, 육지의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바람에 아가미라고 쓰인 제목과 강을 연상시키는 푸른색 책 표지를 볼 때면 괜히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등장인물들도 전부 숨 막히는 삶을 살았을까. 어찌됐건 강하의 이름에 적어도 '물 하'자 정도는 들어가 있으니까. 곤을 숨쉬게 만들었던 유일한 사람은 역시 강하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