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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특권 목록에는 이런내용들이 포함되었다.
내가 승진에 자꾸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는 밤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걷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책임자를 부르면 나와 같은 성별의 사람을 만날 것이 거의 분명하다. 조직에서 더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다고 해서 나의 성별을 탓하지는 않을것이다 .
내가 많은 사람과 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외모가 전형적인 매력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수 있다.
이런 특권들은 대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백인이나 남성의 신체로 살아가는 동안 나의 의도나 노력과 무관하게 펼쳐지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정상적인 조건이자 경험이기 때문이다.
33p_ 누군가는 여전히 특권이란 말이 불편할 수있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이렇게 살기 힘든데 나에게 무슨 특권이 있는거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불평등이란 말이 그러하듯, 특권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유리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 삶이 절대적으로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97p_이런 권력관계를 간과하고 두 집단 사이의 '상호비하' 를 같은 무게로 바라보면 오류가 생긴다.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김치녀' 와 ‘한남충'의 논쟁을 생각해보자. ‘김치녀'와 ‘한남충' 모두 사람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둘 다 바람직한 용어는 아니다.
그렇다고 두가지 비하성 언어가 담고 있는 사회적 맥락까지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김치녀'는 ‘사치를 부리며 남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여성이
남성에게 보여야 히는 ‘바른' 행동에서 어긋나 있다는 평가를 포함한다. 즉 여성에게 기대되는 행동, 말하자면 조신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이라는 억압적인 역할 규범이 부여된 언어이다.
‘한남충'의 경우, 여성이 남성에게 특정한 역할 규범을 요구하는 의미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보다는여성의 입장에서 ‘나도 당신을 조롱할 수 있다'는 호명 권력을 사용하는 현상으로 읽힌다.
156p_2018년 6월의 어느 목요일 오전 10시 서울의 지하철 1호선에서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가 있기 약 8개월 전인 2017년 10월 한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신길역 계단 옆에 설치된 장애인 리프트를 타려다가 계단 아래로 추락하여 결국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시위를 했다. 이날 시위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신길역에서 시청역까지 매 정거장에서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6개 정거장을 가는 데 1시간 40분이 걸렸다. 평소보다 5배 이상 걸린 것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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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정당한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 그 책임은 항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반대가 정당화되게끔 권위와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에게 있다."
소수자의 ‘말걸기'에 다수자가 어떻게 화답하느냐에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시위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시위에 동참해 함께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화답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