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했을 뿐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8시 즈음. 손끝 하나 움직이기 싫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멍하니 유튜브를 보거나 익히 아는 맛의 음식으로 심심한 나를 달래려 하지만 그런 공허한 시간으로는 나를 달래기는 어렵다. 어느새 아홉 시, 열 시가 되면 오늘 하루는 무얼 하고 보낸 걸까, 조금 자조적인 생각에 빠진다. 충분히 그럴 만한 힘든 하루를 보냈어도 자신에게 너그럽기는 좀처럼 어렵다.
나는 나를 다독이는 데 서툴다. 내 마음의 어느 부분을 위로하고 다잡아야 할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여기서 ‘다독이다’는 어르고 달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약한 점을 따뜻이 어루만져 감싸고 달래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고생했어, 다 괜찮아,라는 말에서 그치지 않고 남(혹은 나)를 섬세하게 바라보며 그 사람의 여린 부분을 상처가 되지 않게 위로해주고, 잘못된 부분을 조심스럽게(때로는 단호하게) 말해 주며 달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독이다’는 ‘사랑하다’와 닿아 있다.
오은 시인의 『다독임』 역시 세상과 사람을 향한 따스하고 꼼꼼한 시선을 보낸다. 무턱대고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되돌아보게 한다. 오은 시인이 이야기한 “좋은 문학”의 가진 힘을, 자신의 글들로 보여준다.
“문학작품은, 아니 좋은 문학작품은 무턱대고 ‘힘내’라거나 ‘잘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모르지만 ‘슬프면서 좋은 거’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내일을 생각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함께 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은 절로 뜨거워진다. 그것은 뻔한 위로나 날카로운 조언보다 힘이 된다. 공감이 위로에 가닿는 놀라운 순간이다.”
<슬프면서 좋은 거>, 146-147p.
아직도 장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예순다섯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연에서 죽는 날까지 장래를 생각해야 하는 우리를 떠올리고, “You failed”라는 문구 앞에서 “다시 한 판 하라는 의미예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어린아이를 보며 실패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마음가짐을 되새긴다. 사라지는 우체통과 공중 전화를 보며 무용한 것의 존재 가치를, ‘편하다’의 반대편에서 ‘불편하다’가 아닌 ‘새롭다’를 발견해낸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우리가 겪어온 시대의 아픔과 시인이 겪었던 소중한 이들의 죽음들을 마주하며 느낀 슬픔과 성찰, 그리고 그들로부터 받은 위안을 솔직하게 써내려간다. 그렇게 시인이 직접 가 닿은 사람과 일상과 단어들, 마음이 기울어졌던 대상들로 시인 자신과 독자를 다독인다.
다독다독은 의태어지만 다독이거나 다독임을 당할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뭉근하고 다정한 위로가 들릴 때도 있고 “괜찮아? 괜찮은 거지?”라는 다급한 물음이 들릴 때도 있다. 어느 것이든 괜찮은 사람이 괜찮지 않은 존재에게 건네는 말이다. 하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존재도 그 순간 만큼은 괞찬아지게 만드는 말이다.
마침내 나를 살게 만드는 다독임이다.
「작가의 말」 中
몸과 마음이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순간에, 하지만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그 시간에 이 책을 펼쳐들고 자신과 시인을 다독였다. 그의 글로부터 위안을 얻으면서 만나지 못할 그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듯 다독였다. 괜찮아요, 우리 모두 괜찮을 거예요, 이렇게나 서로를 다독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서로와 세상을 끊임없이 생각하려 하니까.
시인의 다독임이 전해진 순간 책을 하릴없이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야기에 힘입어 스스로를 다독이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