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독서의 재미를 일깨워준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읽었다. 여성 노인이 살인청부업자로 나오는 내용이었는 데 글을 읽는 내내 영화처럼 그려지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다른 독자들처럼 가상의 캐스팅을 하며 읽지는 않았다. 못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다들 '죽여주는 여자'의 윤여정 배우를 생각하며 읽었다는 데 그 영화를 못 봤을뿐더러 노인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소설은 누아르 성격의 부합하게 로맨스 적 장면이 들어가 있다. 올해 들어 가장 마음에 드는 로맨스였다. 평소 로맨스 장르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보다 속 시원한 로맨스가 있을까? 맞다. 속 시원한 로맨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왜 로맨스가 속 시원하냐며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항상 중장년, 또는 노인 남성과 어린 여성을 전제로 하는 로맨스가 진정으로 진절머리 났던 사람으로서 나이 많은 여성과 어린 남성의 로맨스는 소심하지만 속 시원했다.
파과는 갈수록 더 힘 있는 소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잘 쌓아 올린 이야기라 기분이 좋았다.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는 내 인생을 통틀어 제일 좋았던 책이다. 그렇기에 여성 서사로 이루어진 파과는 나에게 있어 큰 안도감이 됐다. 구병모 작가는 내 동심을 빼앗아가지 않았구나. 정말 다행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재방문을 희망하며
2019.6.28,거기까지 연상하다 문득 그녀는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저 숲을 거닐다 자연스레 순하고 연한 풀을 밟아 나가듯 이
런 중얼거림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네가 바로 그 애구나.”
그저 혼잣말 같은 거였는데 그녀는 점차로 가늘어지던 투
우의 눈동자가 다시금 살며시 열리는 걸 본다.
“정말, 기억해?”
그녀는 자기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냈는지 알지 못한
다. 배회하던 숲의 이름이란 어쩌면 기억이었던가를, 투우가
무엇을 종용하는지를 알 수 없다. 아마 묻지 않으면 결국 모
르고 말아버릴 그 무엇.
“갈 때가 되면 떠오른다고.”
투우가 두어 번 턱을 까불다 피식 웃자 입안에 고여 있던
피가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당신은 아직 갈 때가 안 됐다는 거네.”
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바뀐 세상에 대해 좀 안다 하고 배운 바 있어 적응 좀 한다 하며
젊은것들에 대해 사고가 좀 열려 있다고 자부하는, 말하자면
앞뒤로 어설프게 뚫리고 열리는 바람에 실제론 가장 피곤한
유형 가운데 하나인 이 사람은
순수하게 기뻐할 줄 알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그 아이가 부럽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이 손톱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딱히
보여줄 사람이 없기도 하고. 혹시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
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