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보다 훨씬 섬세한 결을 지녔던 이 사람 p7
내가 생각한 일들이 이 문집 속에서 통일되고 정돈된 채 되 될아 왔습니다. p16
처음에는 그것이 내 목소리인 줄도 알아차리지 못했지요.그것은 분명 내 소리이기는 하지만, 내 자신이 내 피와 내 존재의 내면에서 듣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듣는 내 소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p16
나의 삶을 기록한 책을 대강 넘겨 보았습니다. 또다시 웃음이 나왔지요. 잘못된 접근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내 내면의 참된 본질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책 속에 담긴 모든 내용은 진실입니다. 본질적인 내용만 빠져 있을 뿐이지요.이 책은.나를 기술했을 뿐이지,나를 온전히 밝혀주지는 못합니다.그저 나에 대해 언급할 뿐, 나를 드러내지는 못한 셈이지요 p18
글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옹졸하고 진부한 풍토 p22
다소 부산스럽고 예민한 성격을 가진 p26
어리석게 보낸 젊은이. 정말 생각다운 생각이라곤 해 본적도 없었다. 시간을 갉아먹고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에 도취되는 것들, 구속된 감옥으로부터 갑자기 석방된 모든 젊은이들의 공통된 특성 p27
그저 잔소리를 일삼는 기계로, 쉴 틈 없이 나무라면서 정확한 것에만 몰입하는 사람으로서 p30
극도록 혐오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감정을 억누르며 내 뒤를 따라 말없이 방으로 들어오셨던 인간적인 그때의 아버지가 기억납니다 p30
한동안 차가운 눈빛으로 외면하고 서 계시던 아버지가 마침내 안경을 벗어들고 꼼꼼히 그것을 닦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당혹감의 표현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노인이 다시 안경을 쓰고 손으로 두 눈위를 매만지는 모습도 끝까지 보았습니다. 그 분은 내게 부끄러움을 느끼신 것일테고, 나도 아버지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에 서로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장황한 설교를 시작하실까봐 속으로 덜컥 겁이 났습니다.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그런 투의 훈계를 질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고맙게 느끼는 바이지만 노인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p31
그는 나를 혼내는 대신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 대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넌 이제 뭘 하려고 하지?” 나지막한 아버지의 이 물음이 나를 바닥으로 냉동댕이쳤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혼내셨더라면 버릇없이 대들었을 것이고, 애틋하게 훈계하셨더라면 아버지를 조소했을 텐데, 냉정한 아버지의 그 물음은 나의 반항심을 완전히 꺾어 놓았습니다. 그의 진지함은 나의 진지함을, 그 절제된 침착함은 존경심과 마음속의 다짐을 요구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신뢰가 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그 짧은 순간, 소년 시절 내내 그가 차가운 형식주의의 장벽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라고 단정했던 내 생각이 모두 옳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이 일은 열아홉 살이었던 내가 최초로 느낀 감동이었습니다. 그 감동은 강력한 말 한마디도 없이도 내가 삼개월 동안 구축해 놓았던 사내다움, 학생다운 패기, 자기 확신 같은 허황된 사상누각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p34
나 자신을 두들겨 패고 싶었고, 성급하고 경솔하게 그에게
기울어졌던 나의 감정에 대한 분노와 불신 앞에서 온 몸이 떨렸습니다. p58
무미건조, 무색무취의 강의실의 나이 든 남자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p66
하지만 나의 부지런함을 그토록 뜨겁게 가열시킨 것은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그의 신뢰에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고 나를 사로잡았던 그의 미소를 얻고 싶은 허영심,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선생님도 내게 느끼기를 바라는 바로 그 허영심이었습니다. 그가 감동하도록, 그가 놀라움을 느끼도록 사소한 기회라도 놓치지 않고 모두 연습해 보았습니다. 그가 다른 학생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떤 희망사항을 피력하기라도 하면 그것이 내게는 명령처럼 와 닿았습니다. p67
그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를 게걸스럽게 주워 담았고, 그렇게 주워담은 것들을 집에 돌아와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정열적으로 어루만지며 간직했습니다. p68
내게 선생님이 큰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본인도 느꼈는지 아니면 나의 격정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곧 각별히 내게,내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p68
거리낌없이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고무되어 더 짓궂게 이런 저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물음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 깜짝 놀랄 정도로 자유롭게 받아넘겨서 원래의 내 의도는 진척되기 보다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나보다 훨씬 고단수인 이 여성. p74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릴 것이며, 벌거벗겨진 채 시장 한복판에서 채찍질 당하는 것보다 그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이 내게는 더 참담하게 여겨졌습니다. p76
나는 그 분을 언제나 높이 받들였습니다.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과 동떨어진 사람이면서, 언어의 전령이자 창조적인 정신으로 가득 찬 존재로서 그를 생각했습니다. p79
이미 집안 분위기가 특이하게 꼬여있다는 생각이 들었고,..말과 몸짓에서 어떤 긴장감이 존재하거나 두 사람 사이에 언짢은 감정이 드러난 것은 아니었습니다.교묘하게 숨겨지고 알아챌 수 없게 하는 무겁고 후덥지근한 감정의 무풍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 그것이 갈등의 폭풍이나 감추어진 원한의 번개보다 더 무겁게 분위기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표면적으로는 어떤 자극이나 긴장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면으로부터의 거리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을 뿐입니다. p80
부인이 들어오면 갑자기 말을 중단해 버리는 모습에는 나조차도 고통을 느꼈습니다.그의 태도에서 아내에게 갖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쌀쌀맞고 노골적으로 그녀가 끼어드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p82
몰두했던 공부에서 벗어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 머리에서 무거운 헬멧을 벗어버린 듯 편안한 느낌이 들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황홀한 흥분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의 색깔로, 명료한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거의 잊었던 것, 즉 웃음이 고맙게도 정신의 강력한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아무런 긴장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사람은 예전보다 더 꾸밈없고 더 온화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p84
그렇지만 그 비밀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을수록, 알고자 하는 초조한 심정의 유혹은 커져만 갔습니다. p84
감지할 수 없는 언어였고, 파악할 수 없는 형상인 그것은 어느 순간 또다시 내게로 흘러 내렸지만,그것을 결코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모호한 추측으로 정신이 피로해지는..
사실,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아름다움을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p87
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했습니다. 자신을 관찰하는 내 눈빛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그는 왔다갔다 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p88
무의식중에 나를 뜨겁게 만들어 놓고 느닷없이 얼음을 쏟아 붓는 사람,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돌변하는 그 사람에게서 나는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실은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는 점점 더 무정해지고 불안해하며 나를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에 대해 칭찬하면 거의 화를 내며 쳐다보았던 그 도시 사람들의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냉담한 태도에서,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유별난 순간과 갑작스러운 혼란등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p91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의 이상한 돌출 행동 이었습니다. 그의 호의는 교수로서의 의무보다 수백 배나 많은 신뢰를 보여준 것이기에, 제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변명이나 통보를 요구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고 스스로에세 덧없는 설득만 할 뿐 이었지요. 이성은 이글거리는 열정을 통제할 아무런 힘이 없었던 겁니다. p93
폭발할 것 같은 나의 기쁨,나의 환호성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은 것 같았습니다 p97
아무 색채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흘러내릴 뿐인 뜨거운 열과 같은 사상이, 충동적인 격정의 주조에서 쇳물과 같이 흘러나와 서서히 그 형태를 갖추고 그 형태가 둥근 형상으로 변하면서 마침내 명료하게 하나의 언어로 완결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창작의 충만한 감각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p99
"어째서 저를 그렇게 무시하시는 거지요!“ 어째서 제가 하는 말마다 전부 그토록 민감하게 받아들이시는 거지요?“
나는 다시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매끈한 목재처럼 견고하고 어두운 빛을 발하는 그녀의
눈빛과 부딪혀야 했습니다. 오히려 쌀쌀맞고 단호한 그녀의 두 눈은 이해할 수 없는 위협의 불꽃을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p126
나의 감각은 마음속에서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는 어떤 속삭임을 알아차리려 전력을 쏟았습니다. p132
그러자 선생님이 갑자기 마음을 다잡은 듯 내게 다가오면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불쾌하고 꺼림직한 미소.입술을 꽉 깨물며 두 눈에서 위험한 빛을 내는 미소가 낯선 가면처럼 경직된 표정으로 나를 비웃었습니다. 그 다음, 갈라진 뱀의 혀에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p135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친 후에 마음이 진정됨을 느끼자 그녀 앞에서 내 감정을 다 드러낸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p141
“그이가 사람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하는지 나도 알고 있어요. 난 당신이 정작 불안정한 그이한테 의존하는 모습을 보고는 항상 당신에게 경고하려 했어요.” p142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도 포근한 느낌이 밀려왔습니다.
p143
몇 분간의 침묵이 우리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내가 자제하지 못하고 감정을 쏟아낸 것에 대해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고 그냥 잊은 것처럼 처신하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p145
그런데 지금은 그토록 미숙한 행동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곡예하듯 불확실한 감정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했던 그 청년을 지금은 정말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p147
가는 길을 막아서는 사람을 만나면 출구없이 떠도는 분노를 마구 퍼붓고 싶은, 위험하기 그지없은 기분이 내 마음속에서 날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빈정대기라도 하면 그것을 빌미로 시비를 걸 작정이었습니다
p149
난 어리석게도 나 자신을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로 만들고 동시에 선생님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졸렬하고 기만적인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선생님을 무시하고 있으며,그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p150
부끄러움 때문에 온몸이 오그라들었지요, 두들겨 맞은 개처럼 아주 조용히.. p152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 보았자 속마음이 편치 않았고, 우울한 마음이 들고 가슴이 답답해서..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 우리 두사람 사이에는 숨 막히고 질식할 듯한 불안이 생겼습니다. 소용돌이 치는 위험한 피의 흐름이 강렬하고 밝은 쾌감을 통해 묵직하게 씻겨나가는 듯 했습니다. p161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건너 뛴 채 말하고 웃었습니다. 시선이 마주치면 무의식중에 같은 감정을 느끼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가져온 고통이 여전히 느껴져서,부끄러운 불안감으로 상대방의 기억을 느끼고 있었던 것 입니다. 우리 둘은 예민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로 남게 된 우리의 대화는 일종의 껄끄러움으로 방해를 받았습니다.p 165
수치심이 의지와 상관없이,그러나 뜨겁게,아주 뜨겁게 타올라 달아오르면서 작열하듯 치솟아 쏟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근심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집요하게 되물었지요. p169